다음 목적지는 냐짱(Nha Trang)이었다. 일단 냐짱이라고 표기는 하는데 현지에서는 나트랑에 가깝게 발음했다. 오히려 어설프게 발음을 흉내내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다낭에 무사히 도착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냐짱에서의 일정을 하루로 줄였다. 이제 지도에 출발지, 도착지만 찍고 편하게 움직일 수도, 간단하게 택시기사에게 휴대폰으로 주소를 보여줄 수도 없어서 주소를 받아적어야 했다. 불편하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노숙할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동은 평소보다 지루했다. 여태까지는 넷플릭스에서 받아놓은 베터 콜 사울을 몇편 보고나면 도착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멍하게 보내는 시간을 못 견디는 사람은 아니지만, 4시간은 스도쿠를 메모장에 옮겨둘 생각을 하지 않았던게 아쉽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길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방에 도착했다.
어릴 때 나는 쓸모 없다는걸 알면서도 냉장고, 전자레인지, 리모컨 등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시계들을 맞추곤 했다. 어린 나도 그 시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기계를 조작할 구실일 뿐이었다. 그 기능이 이제는 필요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서 시간을 맞췄다. 그 순간,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소리가 들렸다. 이전에 시계의 기능을 수행하던 기계가 내는 소리였다. 내 휴대폰은 물리키가 있는 기종이었기에 화면이 보이지 않아도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여행 중에 한국어로 대화를 나눈 유일한 순간이었다.
해변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었지만 해변을 보고 싶진 않았다. 열차 시간표를 확인해야 했지만 움직일 기분이 아니었다. 책상에 앉아서 멍하니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딱히 입맛이 돌진 않았지만 밤이라 인지하고나니 뭔가 먹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밖에 나오니 여기저기 램프가 붙어있는 마치 자전거와 유모차를 합쳐놓은 생김새의 인력거들이 다니고 있었다. 그 인력거들만 따라다녀도 좋은 경치들을 볼 수 있었겠지만, 여전히 그럴 기분은 아니라서 간단히 식사만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달랏에서는 새벽에는 체크아웃을 할 수 없었다. 여기는 어떨까 싶어 리셉션 직원에게 체크아웃이 가능한 시간을 물었는데 아무 시간에나 상관 없다고 했다.
잠을 자는둥 마는둥 누워있다 하늘이 밝아오기에 방문을 나섰다. 미안하게도 로비에 매트릭스를 깔아놓고 자고 있는 직원을 깨워 체크아웃을 하고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매표소 직원이 매표소 안에 침낭을 깔고 자고 있었다. 이번에는 깨우지 않고 역을 잠깐 둘러보았다. 대합실을 청소하던 직원이 매표소 직원을 깨웠다. 다낭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10PM이라며 표값을 적은 종이를 내민다. 돈과 함께 꺼낸 "Tonight?"라는 나의 물음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표를 내밀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왔는데 밤까지 가방을 짊어지고 시간을 보낼 생각에 막막했다.
역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카페를 찾아다니는 동안 가로수가 울창한 길을 지났다. 가로수에 정해진 규격도 없는지, 인도를 완전히 다 막고 있는 나무도 있었다. 가지도 마음껏 뻗어서 맞은편에 있는 가로수와 가지가 얽혀서 마치 도로가 터널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로수하니 생각났는데, 베트남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가로수는 밑둥이 흰색으로 칠해져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태양이 너무 뜨거운 나라들에서는 나무가 습기를 잃어버리는걸 막기 위해서 햇볕을 반사하는 흰색 페인트를 칠한다고 한다. 나무를 갉아먹는 벌레로부터도 보호해준다고도 한다. 밑둥 하얀 나무들이 이룬 터널을 지나 찾은 카페에서는 시간을 한참이나 흘려보냈다. 아니, 한참이라기에도 부족할만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칠 때쯤 역으로 돌아갔다. 내 옷에서는 길거리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 냄새와 땀냄새가 섞여서 배어 아주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 옷에 몸이 닿아있다는게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괴로운 1시간을 보내고 기차표를 꺼내보았다. 확실히 많이 지친 모양인지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를 했다. "Tonight"에 고개를 끄덕이는 매표소 직원의 모습에, 다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표를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글
베트남 여행기 1. 호치민에서의 첫날
베트남 여행기 2. 아기자기한 무이네
베트남 여행기 3. 운수가 좋았던 달랏에서의 하루
베트남 여행기 4. 구르는가, 멈추었는가
그래서 다 밑동이 하얗게 빛났군요 ㅎㅅㅅ
여행할땐 시간이 풍족해지죠 ㅎㅎ
베트남 여행기 잘 보고 있습니다^^
앗 이런~~ 시간이 잘 못 되었군요. ㅠㅠ
베트남에 여행을 갔는데, 여행이 폰도 그렇고 많이 꼬였네요.
다음 편은 과연...
두둥
헐랭.. 표가..
다음 이야기 또 들려주세요 ㅎㅎ 표가......
헙 표가 잘못되었던 모양이네요. 근데 문득 우리나라도 이정도 되면 나무에 흰칠 해야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
스프링쿨러가 많아서 자주 식혀주니 괜찮나봐요.
표가...으앗! 과연 다음은 무슨 일이 생긴걸까요?!
시골에 살때 보면 복숭아 농사를 짓는 분들이 오래된 복숭아 나무 밑둥에 흰 페인트를 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트남도 가로수에 그렇게 해주는가 보네요.^^
나무밑둥에 흰색을 칠하는게 그런이유 였군요^^
그러고보면 예전엔 다양한곳에 시간이 표시되었는데 요새는 폰으로 대부분 해결하는군요.
으어 안 불편이 감사로 다시 불편으로 가는 건가요...차편은 떠나가고...
헉, 긴장감 최고.
여행기에 긴장감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