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하지 않고 정성적이다' 라는 수사는 생명과학을 비판하는 (혹은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거 중 하나입니다.
제가 이 말에 백프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엄밀하고 정량적' 이어야 할 영역에서 '엄밀하지 않고 정성적인건' 분명히 비판의 대상이 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집단유전학은 진화생물학의 이론적 근간을 이루는 동시에 대단히 엄밀한 영역의 과학입니다.
그리고 집단유전학은 '정량적이고 엄밀한 과학' 이기 때문에 '실제로 쓸 수 있는' 응용을 만들어냅니다. 제가 공부하는 질병유전학부터 전염병 예방과 예측, 농축산물 개량 및 해충 방제 등에 쓰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정량적 기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유전학에서 정량적이라 함은
- 질병에 기여하는 특정 변이를 '특정' 해낼 수 있고
- 그것이 '얼마'만큼 영향을 주는지(예를 들면, 질병의 위험을 2배 증가시키는지 3배 증가시키는지) (effect size)
- 유전체 상에서 어떤 위치(몇 번 염색체의 어떤 유전자 사이)에 존재하는지(linkage analysis 외 etc)
- 인구 중 몇 프로가 해당 변이를 가지고 있는지(common variant, rare variant)
- 그 집단이 조상 집단으로부터 몇 년전에 어느 정도의 규모로 떨어져 나왔는지(이를테면, 아슈케나지 유대인, 아프리카너 백인 등)
등등을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겠지만 1~5에 해당하는 정보 하나 하나가 질병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많은 연구들의 근본은 하디 베인베르크 균형(Hardy-Weinberg Equilibrium)입니다. 일견 단순해보이는 이 균형은 선택(selection),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 근친교배(inbreeding) 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집단의 진화를 정확하게 기술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를 검정하는데 있어서 영-가설(Null Hypothesis)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면, 샘플링한 데이터가 모집단을 잘 대표하는지, 선택이나 부동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지 등을 알아보는 일 등이 있겠습니다. 따라서 하디 베인베르크 균형으로부터 벗어난 정도를 측정하면 그 집단이 경험한 여러가지 선택, 부동, 근친교배 등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량적'으로요.
이런 전통적인 응용을 넘어서 비교적 최근의 연구들은 (제가 얼마 전에 스팀잇에 포스팅하기도 했던) 하디베인베르크 균형으로부터의 벗어남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질병-유전자 상관관계를 포착하기도 합니다. 하디와 베인베르크의 이론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즉, 이러한 정량적인 기술들은 진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 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교 보건대학원의 유전체 역학(Genomic, Genetic Epidemiology)에서는 아래 강의 계획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디 베인베르크 법칙, inbreeding, 자연선택 등을 먼저 가르칩니다. 그것들이 유전자 빈도, 연관(linkage), 반수체 빈도(haplotype frequency) 등 진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양(quantity) 들을 어떻게 '얼마'만큼 변화시키는지 배운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질병의 진화와 같은 좀 더 발전된 내용을 배우게 되구요.
그런데 학부 교양수업(저희 학교의 경우 진화와 인간사회 등)들은 이런 건 개무시하고 '인간이 어떤 환경에 살아서 어떤 선택압을 받아서 어떤 특징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같은 '수식없고 말로만 쓰는 소설' 만 주입할 뿐입니다. 참고로 본교에는 집단유전학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학부 수업 자체가 없습니다. 전공 과목에서 조차요.
'말로 씨부리는 소설'은 현재 생명과학계의 가장 거대한 위협 중 하나입니다. 단순한 몇 개의 실험이니 관찰과 기전(mechanism)에 의존해서 질병을 고칠 약물을 개발한다느니, 인류 본성의 기원의 비밀을 밝힌다느니 굉장한 얘기들을 해댑니다. 그래서 '베타 아밀로이드가 치매의 원인이야!' 라고 주장한지 몇년이 지났는데도 베타-아밀로이드를 타겟으로 하는 약물이 인간에게 있어서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죠. 오죽했으면 최근 제약사들은 Cell, 네이쳐, 사이언스 같은 럭셔리 저널에 올라오는 연구들조차 신뢰하지 못해서 연구자에게 연구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할 때 일시불로 안 주고 임상시험 경과를 보면서 지급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듯 분자 수준의 잘 통제된 실험 뿐만 아니라 숱한 동물 실험을 통해서도 입증된 '그럴싸 해보이는 가설'도 매번 실패하는 마당에 '인간의 본성은 진화의 산물이다!' 라고 단순하게 주장하는 진화심리학, 사회생물학 같은 소설들이 성공할 확률은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디 베인베르크 법칙, 자연선택, 유전적 부동 등에 대한 엄밀하고 정량적인 분석 없이
'인간이 어떤 환경에 살아서 어떤 선택압을 받아서 어떤 특징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같이 같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가설을 정말로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그게 '과학계 정설'로 포장해서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소위 ^과학자^, ^과학철학자^들은 정말로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지? 한 번 되물어 봐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어떤 학부 수업도 진화생물학을 엄밀하게 전개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디-베인베르크 법칙은 일반생물학에서 시험 문제 낼 때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 정도에 불과하죠. 특정 학과의 몇몇 고학년 수업에서 조-금 더 강도있게 다루고 지나갈 뿐 이 핵심적이 이론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수업은 교양이든 전공과목이든 단 한 개도 없습니다. 이를 배우고 싶은 학생은 혼자서 독학을 하든 격년으로 열리는 대학원 과목을 힘들게 청강하는 수 밖에요.
그리고 한 술 더 써서 '엄밀한 기초'도 없는 학생들에게 '뜬구름 잡는 소설'부터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뜬구름 잡는 소설'을 가르치는 수업은 학부 교양에 굉장히 많이 있죠. 사회과학대학에서도 열고 생명과학부에서도 열립니다. '교양도서에 써있을법한 얘기', '우리의 관심을 끌법한 얘기', '통속적인 얘기'들이 주를 이루죠. 그냥 봤을 때 재밌고 흥미로워 보이는 얘기들. 남녀가 어떻다느니, 인간의 인지기능이 어떻다느니, 지능이 어떻다느니... 이 중에 진지한 과학적 논의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그저 재밌어보이고 신기해보이는 얘기들만 주구장창 하죠. 물론 그게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