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잊혀지는 것>을 보고(스포 주의!)

in #kr-review7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식빵입니다~ 요즘 다시 비가 내리네요. 맑은 하늘 본지 참 오래된 거 같습니다. 무더위는 싫지만.. 그대로 어서 빨리 구름이 걷혔으면 좋겠어요. 우중충한 날씨를 잊을 겸 어제 오랜만에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갔답니다!

티켓 사진.jpg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잊혀지는 것>이라는 극을 보았습니다. 프로젝트<새싹> 중 하나의 연극인데요, 신인 작가들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 시작된 것이 프로젝트<새싹>이라고 합니다. <잊혀지는 것>은 그 중 첫 번째 연극이라고 하네요.

포스터와 리플렛


포스터.jpg

리플렛.jpg

보시면 아실 수 있듯이 첫사랑이 소재인 극입니다. 첫사랑이 소재였기 때문에 로맨스 극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달달하지는 않고 오히려 제목의 '잊혀지는'이 더 중점이 된 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대.jpg


무대 사진입니다! 늦었다고 헐레벌떡 들어가서 찍어서 그런가..
창문은 사진에 나오자 않았네요 ㅠㅠ 그저 디자인을 위해 달았다고 생각하고 안찍었나봅니다. 원래는 왼쪽에 창틀이 떠있습니다.
있을 것만 있는 깔끔한 무대였습니다. 소품도 침대 가운데칸에 있는 옷 더미와 책 더미를 빼면 전부 사용되고. 곳곳에 있는 나무 모양도 알고보면 주인공과 관련된 장식이었구요.
그 외에도 연기가 살짝 깔려있었는데 조명을 받아 참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연우소극장이 일반적인 소극장 모양이 아닌.. 'ㄱ'자 모양이랄까요? 90도 꺾여져있는 형태여서 그런지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만 지정좌석제가 아니어서 어디 앉아야 극을 잘 볼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헤헤




극에 대해 한줄평을 하자면 쫀디기같은 극이라고 하고싶네요.
처음에는 무슨 맛인지 모르다가 곱씹을수록 맛이 느껴지는 그런 극이었달까요.
'잊혀지는 것, 잊어야 하는 것, 잊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스포주의!! 다음부터 나올 글들은 스포덩어립니다!!
















0. 줄거리


장마가 이어지는 날, 갑자기 밖에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다는 천연덕스러운, 어쩌면 뻔뻔한 이유를 들이대면서, 나무의 자취방에 5년 전 헤어진 첫사랑 영화가 찾아옵니다.. 헤어진 연인이지만 영화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무를 대합니다. 얼마 전에 히말라야 등반갔다왔다며 기념품을 주기도 하고, 나무 집에 있는 컵라면을 끓여먹기도 하고, 병나발을 불며 와인도 마시고.. 그러던 중 나무의 현 여자친구 새봄이 찾아옵니다. 남친 생일을 챙기기 위해 미역국까지 끓여왔는데.. 남친의 자취방에 남친의 전 애인이, 그것도 첫사랑이 있는 모습을 보며 새봄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리고 자기보다 첫사랑을 챙기는 나무의 모습을 보며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새봄은 떠납니다.

조명이 바뀌는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 나타납니다. 나무는 영화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이것을 깨닫고 얼마 있지 않아 영화는 이제 떠나야 한다며 나무의 자취방을 떠납니다.

알고보니 이것은 모두 나무의 꿈 속이었습니다..! 일어나고 보니 장마는 그친 지 오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날씨였습니다. 잠에서 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봄이 미역국을 들고 찾아옵니다. 나무는 정말 생생한 꿈을 꿨다고 말합니다.
새봄이 나무의 방을 정리하면서 '아 맞다, 그거 아냐고, 히말라야 등반하던 사람들이 눈사태를 만나 몇 명 실종되고 한국인 한 명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나무가 새봄을 안으며 '우리 결혼하자'고 하며 극은 끝이 납니다.






1.이름


나무, 영화, 새봄. 총 3명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세 이름 모두 연출의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주인공입니다. <잊혀지는 것> 극 자체, 아니면 1인칭 주인공 소설에서의 '나'라고 봐도 무방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남은 두 인물을 '나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영화
'빛날 영'에 '꽃 화' 빛나는 꽃입니다. 꽃이 가장 화려하게 펴 있는 모습입니다. 극 중 '너는 나무, 나는 꽃. 우리는 천생연분이야'라는 투의 대사를 하지만.. 꽃이 가장 화려하게 펴있다는 것은 반대로 꽃잎이 하나 둘 떨어져 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둘의 과거 회상 신 중 이름과 관련된 대사에서도 '꽃잎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요, 처음부터 영화라는 이름은 지나간 과거, 이제는 잊혀질 인연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새봄
봄이 오면 나무는 풋잎을 내밀고 한 해를 준비할 기지개를 켭니다. 나무에게 있어 봄은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지난
가을과 겨울, 나무가 꽃과 잎을 떨어트리고 새롭게 한 해를 맞이하는 시기입니다.
나무의 꿈 속에서 새봄의 존재는 미미합니다. 그러나 꿈을 깬 뒤 현실에서는 나무 옆엔 새봄만 있으며 그녀와 함께 할 계획(결혼)을 말하기도 합니다. 새봄은 지나간 과거의 인연, 즉 잊혀지는 것을 대신하여 만날 새로운 인연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2. 슬리퍼


나무의 자취방엔 슬리퍼가 놓여져 있습니다. 처음에 영화가 등장하여 신발을 벗었을 때 영화 앞에는 슬리퍼가 놓여져있지만 영화는 슬리퍼를 신지 않고 들어옵니다. 이는 새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봄이 처음 등장할 때도 새봄 앞에는 슬리퍼가 있지만 슬리퍼를 신지 않고 들어옵니다. 방 안에서 슬리퍼를 신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무 뿐입니다.

그러나 나무가 꿈에서 깨고 난 뒤, 영화가 들어올 때 영화는 신발을 벗은 뒤 슬리퍼를 신고 들어옵니다.

슬리퍼는 실제 인물과 상상 속의 인물을 나누는 기준 역할을 합니다. (극의 초중반에선) 나무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고, 슬리퍼를 신지 않는 영화와 새봄은 나무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상상 속의 인물이라는 것을 극 맨 앞에서부터 암시하고 있습니다.






3. 나무의 생일


시간적 배경은 나무의 생일입니다. 극에서 나무는 얼핏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생일도 기억 못할 정도로 정상적인 모습과는 괴리감을 보입니다.

비록 영화가 떠난다고 말을 꺼냈고, 나무가 영화를 붙잡긴 하지만, 영화는 나무가 만들어낸 꿈 속의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즉 영화에 대한 나무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제 나무에게 영화는 '잊혀진 것'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힘들었지만 나무는 드디어 영화를 보내주었습니다(=잊었습니다). 꿈을 꾸고 난 후 나무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새봄은 이에 대해 살짝 놀라는듯한 반응을 보입니다. 잊어야 할 것을 잊고 나서 나무는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무의 생일은 <잊혀지는 것>의 주제의식 중 '잊어야 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소재입니다.






4. 컵라면, 화분


나무에게 컵라면과 화분은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입니다. 꿈 속에서 컵라면은 영화가 좋아하는 음식이며, 화분은 영화가 나무의 자취방에 들어올 때 놔둔 선물입니다.

영화와 헤어지고 난 후 나무는 컵라면을 싫어합니다. 새봄의 '오빠 컵라면 잘 안먹잖아'라는 대서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나무는 방 한 칸에 컵라면을 쟁여놓고 있습니다.

화분은 과거 영화와의 기억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화분 옆에 있는 조각상들을 나무가 다시 정리하면서 '다 기억하고 있다'는 대사로 암시됩니다.

꿈에서 깬 뒤 새봄이 들어왔을 때, 새봄은 영화의 흔적들 앞에 섭니다. 반쯤 먹다 남은 컵라면 앞에서, 이후 자리를 옮겨 창틀 앞에 놓여져 있는 화분 앞에 서서 나무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컵라면과 화분은 '잊어야 하는 것'을 다 잊고도 여전히 남아있는,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예전과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꿈에서 깨고 난 후 나무의 반응은 한 층 더 성숙해져 있습니다.








연극 <잊혀지는 것>은 탄탄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기 위한 요소들도 많고요.(위에서 정리하지 않은 것들도 많습니다! 제가 지금 기억이 나지 않을뿐 ㅠㅠ) 굉장히 짜임새 있고, 작가의 노고가 보이는 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극의 의도가 원래 이런건지, 연출이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제 코드와 잘 맞이 않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반까지 굉장히 평이했습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연극적'인 게 나오는데(ex. 새봄과 이야기 할 때 영화가 기침 소리가 점점 커지자 영화한테 달려가는 장면) 이를 좀 더 세련되게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극었다고 생각합니다! 극을 보고 난 뒤로 오히려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지네요. 마치 고전영화를 본듯한 기분입니다. 내일까지 연극이 열리는데요, 만약 내일 시간 되신다면 한 번 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음 번에도 <잊혀지는 것>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