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마당에 가끔 새 한마리가 날아온다. 참새보다 조금 크고 날렵해 보이는 그 새는 짝도 친구도 없이 늘 혼자다. 새는 갈색과 녹색의 줄무늬가 선명한 날개를 파닥이며 향나무와 모과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가끔 낮은 가지에 앉아 경계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부리로 무언가 쪼아 보기도 하며 생각에 잠긴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한다.
나는 거실의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한참씩 노는 새를 훔쳐본다. 곧 휘파람 소리 같은 고운 노래가 튀어나올 것 같으나 한 번도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본래 이름이 무엇이던 간에 나름대로의 별명이라도 지어 주고 싶었지만 울지 않는 새에게 줄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새는 모양보다는 울음소리를 형상화하여 이름을 붙인다. 누구는 새소리를 운다고 표현하고 또 어떤 사람은 노래 부른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애환이 담긴 언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환희에 찬 외침일 때도 있고, 가끔은 짝을 찾는 노래일 수도, 또는 피맺힌 울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에도 질곡은 있을 터이니 노래이기보다는 울음일 때가 많지 않을까.
구구구-꿈속에서 듣는 듯한 비둘기 우는 소리느 뿌연 안개 서린 새벽, 감꽃 줍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그 소리에는 아련한 기억 속의 젊었던 어머니와 어린 가슴이 느끼던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까지도 그대로 묻어있다.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보리 익는 황금들판과 하얀 찔레꽃 피는 고향 언덕을 떠올린다. 이 산에서 뻐꾹, 저 산에서 뻐꾹, 골짜기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는 하나가 우는지 둘이 마주 우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뻐꾸기를 나는 내 멋대로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한다. 이렇듯 새의 울음소리는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데려간다. 아름답지만 지저귐이 없는 저 새도 나처럼 울 줄을 모르는가.
나는 단 한 번도 마음껏 소리 내어 울어 본 기억이 없다. 소리까지 내지 않더라도 나를 있는 대로 펼쳐 놓고 실컷 울어 속을 풀어 본 적이 없다. 사람은 아플 때, 슬플 때, 억울할 때 운다. 때로는 기쁨이 넘칠 때도 눈물이 난다. 그것은 감정의 결이 육체에 전해지며 나타나는 반사작용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슬픔도 고통도 있는 그대로 쏟아내며 울고 나면 가슴이 조금은 후련해질 것 아닌가. 나는 그 눈물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울컥 격한 감정이 치밀 때, 그것을 눈물과 함께 자연스레 흘려내지 못하고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는 습관이 언제부터인가 몸에 배어 버렸다.
얼마 전 어느 장례식에 갔었다. 망자가 이순耳順을 넘겼으니 좀 아쉽긴 해도 기가 막히게 억울한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싶었다. 관이 나갈 즈음 그 부인이 관을 잡고 몸부림을 쳤다. 통곡 소리가 동네를 뒤흔들었다. 함께 했던 갖가지 사연들을 통곡속에 섞어 구구절절 풀어내며 울었다. 보는 이들이 모두 울었다. 나도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다.
나는 그 날 슬피 우는 부인을 보며 울어도 좋을 때, 울만할 때는 체면 접어놓고 마구 우는 것도 참 괜찮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한바탕 거방지게 울어 주는 것이 남은 자가 해야 할 몫인 것 같기도 했다. 그 몸부림이 마지막 이별인 출관出棺예절 분위기에 걸맞게 어울린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육친을 잃고도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장례식장에 냉랭하게 서 있던 나를 떠 올렸다. 나라는 사람이 인간적인 탄력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는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나의 삶을 긴장시키고 도사리게 했던 것이 대체 무엇이었던가.
어릴 적부터 유가儒家의 엄격한 훈육은 마음대로 소리 내어 우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도 절제하는 것이 미덕인 줄 알았다. 어떤 경우든 흐트러진 모양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우는 것이 아주 부끄러운 일인 줄 알고 자랐다. 그 의식이 잠재되어 나를 이렇게 꼬장꼬장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
그러나 울 줄 모르는 것이지 결코 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를 되뇌는 건 역으로 어느 누구보다 많이 운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남의 일에는 잘 운다. 그것도 속울음으로, 그러나 내게 닥쳐온 슬픔이나 고통에는 번번이 마음을 도사린다. 마치 울음소리와 동시에 자신이 허물어져 내리기라도 하듯 바짝 긴장을 한다. 마음껏 토해내지 못한 눈물은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는다.
울지 못하는 저 벙어리 새도 나처럼 우는 일에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는가. 아니면 기쁨도 고통도 다 쏟아내 버린 빈 가슴인가. 속내야 어떻든 사람들은 울 줄 모르는 나에게서 얼음 같은 냉기 밖에 더 느꼈을까. 눈물이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생이 한참 기운 뒤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눈물에 정직하지 못했다. 눈물 앞에서도 사랑 앞에서도 긴장하며 '차렷'을 하던 매력 없는 여자다. 이제 나를 좀 풀어야겠다. 스스로 지켜온 딱딱한 틀을 깨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울고 싶을 때 파안대소破顔大笑하고 울고 싶을 때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인생이 얼마나 여유로울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지키느라 그렇게 철저히 무장할 일이 무엇 있겠는가. 이왕이면 멋지게 우는 기술을 좀 배워야할까 보다.
어느 시인은 말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