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찾아본것 옮깁니다.
모리츠는 "1756년 독일 북부 소도시 하멜른의 궁핍한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자 제조 기술을 익히는 견습생 생활을 했다. 에어푸르트 대학과 비텐베르크 대학을 다니며 신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786년 이탈리아 여행길에 괴테를 만나 2년간 교류했다. 독일로 돌아온 뒤 1789년 바이마르 공국의 칼 아우구스트 공의 중재로 베를린 대학의 문학이론 및 고전문헌학 담당 교수가 되었다. 1793년 6월 26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의 <안톤 라이저> 역자해설이 "'고통의 역사(Pathographie)와 소설의 형식"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사회사의 이면에서 '고통'이란 주제에 민감했던 작가로 보인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는 인용이 이해가 갈 만큼.
이해하기 까다로운 건 인용문의 첫문장인데,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세계의 문학>)나 "동물은 죽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동물적이 된다."(<비평과 진단>) 같은 번역문들은 그 까다로움을 풀어주지 못한다. 영역본엔 "One becomes animal all the more when the animal dies."로 돼 있다(불어 원문은 "On devient d'autant plus animal que l'animal meurt."). 러시아어본은 "동물-되기는 동물이 죽을 때 더욱 확실해진다" 정도로 옮기고 있다.
아마도 여기서 의미하는 동물은 사회의 최하계급(노동자,노예 등을 비롯한 착취당하는 모든사람)인것같습니다. 동물들 가축들은 식량을 목적으로 사육되듯 그런식으로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거 아닐까요? 모리츠가 얘기하는 동물과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동물은 약간 다른 것같네요.
모리츠의 동물이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면 들뢰즈의 동물은 생각이나 개념,사상,언어등에 대한 연민입니다.
<안톤 라이저>를 읽어보면, 죽음과 관련해서 동물(송아지)에 대해 두려움에 떨며 사색하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책 중후반부에 있습니다.
공포는 미지로부터 나오는거라 생각합니다. 즉 과거 석기시대의 우가차카 하던 원시인들은 지식의 부재로 인해 죽음의 원인이 악행의 결말, 신의 분노, 윤리 역행등의 사유로 설명을 했지만 현대인들은 지식의 보편화로 죽음의 원인을 어느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같은데서 보면 동물들이 위험, 위기를 느끼는 감지능력이 더 뛰어나잖아요? 이건 바로 인간이 '자신은 많은것을 알기 때문에 불안한 상황을 컨트롤 할수 있다'라고 자만하는데에서 오는 위험감지 기관의 퇴화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자동차에 고양이를 태우면 낮선 환경에 고양이는 불안해 하지만 인간은 그 고양이를 달래죠. 정작 본인은 사망확률이 암발률보다 높은데도 말이죠.
제 생각엔 동물과 인간을 구분짓는건 바로 이러한 지식의 차이이고 저 문장은 죽음에 관한 지식을 더 많이 안다 -> 자만으로서 위험 감지력이 떨어진다 -> 죽음에 둔감해 진다 로 뻗어나가게 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좀 뜬금없는 내용인것 같지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