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들여다보고 싶어 한가득 손에 쥐려 하면 고운 모래알들처럼 느낄 겨를도 없이 빠져나가고 만다. 모래시계를 떠올려 본다. 가운데 부분이 잘록하게 얇아졌다 다시 넓어지는 원통형 유리 안에 노랑의 반짝이는 모래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의 모양이다. 요즘 따라 시간이 전에는 짐작할 수도 없었던 빠르기로 나를 스쳐 지나간다. 엊그제와 어제가, 어제와 오늘이 구분되지 않고 머릿속에서 뒤엉켜버린다. 가뜩이나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방향마저 잃은 채 내 속에서 헤맨다. 그나마 짧은 기록이라도 남겨 놓지 않은 어떤 날들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증발해 버린다. 이렇게 투정하는 사이 어느 날엔 좋은 책을 만나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화분에 담긴 식물 같았던 시간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모두가 식물인간인 줄 알았지만 실은 매 순간을 듣고 느끼고 이해하고 있었던, 마틴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책의 저자 마틴 피스토리우스는 내려앉는 햇빛과 그림자의 모양으로 시간의 흐름을 읽고 무엇이든 끊임없이 곱씹으며 시간을 견고한 기억의 형태로 만들었다.
열두 살의 어느 날 목이 아파 학교에서 조퇴한 마틴은 음식을 먹지 않게 됐고 아파서 걷기 힘들 지경이 되며 몸이 점점 약해졌다. 정신 또한 허약해졌고 사람들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그러다 근육을 사용할 수 없게 됐고 사지가 마비됐다. “깨어 있는 코마 상태”. 마틴은 의료진이 손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낮에는 돌봄시설에서 지내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시작했다.
4년 후, 기적처럼 마틴의 의식이 다시 깨어났다. 하지만 가족들조차 마틴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마틴은 온몸으로 자신의 변화를 말하고 있었지만, 사람들 눈에 그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나는 화분에 담긴 식물과 같았다. 물을 주어야 하며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 모두들 익숙해진 탓에 내가 다시 실재하기 시작했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34p
누군가 말을 걸었고, 내가 말을 했다
나를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일거리였다. 요양사들에게는 수년간 같은 곳에 머물러서 관심이 가지 않는 익숙한 붙박이 가구였다. 부모님이 집을 떠나 있어야 할 때 나를 보냈던 돌봄시설의 복지사들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환자였다. 나를 진료한 의사들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대상이었다. 어느 의사가 동료에게 엑스레이 촬영대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이 마치 불가사리 같다고 말했듯이. 35p
많은 사람이 마틴을 “일거리”로, “붙박이 가구”로 대했다. 마틴 앞에서 코를 파고, 사타구니를 긁고, 약속시간보다 마틴을 늦게 데리러 오는 마틴의 아빠를 욕했다. 뜨거운 음식을 입안에 억지로 넣으며 빨리 먹으라고 재촉했고, 물건을 던지듯 마틴을 옮겼다.
하지만 간병인 버나는 달랐다. 버나는 마틴에게 말을 걸었으며 마틴에게 의식이 있고 의사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동료 간병인들이 온갖 의구심을 표했지만, 버나는 흔들리지 않고 마틴의 부모님에게 보다 정밀한 검사를 받아 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마틴은 한 의사소통센터에서 어렵사리 자신에게 의식이 있으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몸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마틴은 시선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놀라운 변화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부모님은 마틴의 말을 대신해 줄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구입했고 마틴은 점점 의사소통 능력을 키워갔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던 몸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돼 스위치를 사용해 말하고 싶은 단어를 골랐다. 컴퓨터 음성이 마틴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처음에 마틴은 원하는 단어에 커서가 가닿길 기다리며 힘겹게 의사소통했다. 계란 프라이를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지금이다! 그림이 밝게 표시된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스위치를 쥐려고 하자, 손가락이 빨리 움직여주지 않는다. 다시 손가락으로 스위치를 꽉 누르려고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내 손이 나를 거역하여 밝기 표시가 다음 그림으로 이동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결국 계란 프라이를 놓치고 말았다. 다시 그 어휘를 선택하려면 커서가 모든 그리드를 거쳐 계란 프라이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102p
마틴은 가족,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던 간병인 등의 도움으로 몸을 움직이는 능력, 의사소통 능력을 점점 키웠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강연자로 나서고 일자리를 얻고 친구를 사귀는 데까지 나아갔다. 컴퓨터 속 단어의 그리드는 점차 넓어졌고 표현방식 또한 정교해졌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어려움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모든 말을 시종일관 또박또박 전자음으로 발화”할 수밖에 없어 행복이나 고통, 분노 같은 감정을 전달하기 어려웠으며 그마저도 말한 다음에는 공백이 찾아왔다.
말 다음에는 공백이 찾아온다. 예전에는 내가 할 말을 속으로 상상하거나 머릿속으로 끝없이 대화를 나누며 몇 시간씩 보냈다. 하지만 정작 말을 할 수 있게 되니, 생각과 달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가 자유로이 주어지진 않았다. 나와 나누는 대화는 느리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내가 컴퓨터에 기호를 입력하거나 알파벳 보드에 나타난 문자들을 가리키는 동안 잠자코 기다려야 한다. 사람들은 침묵을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나에게 말 붙이기를 꺼리게 된다. 186p
기록을 남기다
마틴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마틴과 이야기할 때의 공백을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다. 조애나는 마틴을 돌봐주어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아침을 만든다는 마틴이 무슨 실수를 할까 뒤에서 지켜보지 않고 멀리 혼자 앉아 책을 읽었으며, 스스로 선택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마틴에게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했다. 도와주고 도움받는 관계가 아닌, 평범한 연인. 마틴과 조애나는 결혼을 결심한다.
책은 마틴과 조애나의 결혼식을 그리며 끝을 맺는다. 마틴은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용기를 냈고, 어두웠던 지난 시간을 많은 사람 앞에 꺼내 놓았다.
마틴은 자신의 몸 밖으로 나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통과 죄책감으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엄마를 지켜보면서도 삶을 내려놓기보다는 엄마의 절망을 이해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조금씩 한계를 넘어섰다.
아주 오래전 읽었던 <오체불만족>이란 책이 떠오른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었던 고등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인간의 의지로 못할 일이 없지, 하며 내가 매진하고자 했던 것은 고작 수능 점수였다. ‘인간 승리’를 말하는 책들을 읽으며 나도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았던 내가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옹졸하고 이기적이다.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그 상황을 나의 현재에 대입했던 것이다. 그때 내 마음을 좀 더 거칠고 못된 말로 바꾸면 ‘나보다 못한 처지인 사람들도 뭔가를 이루는데 내가 못할 게 뭐 있어.’ 정도였다. 부끄럽다.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마음을 집중해서 읽었다. 내가 마틴이라는 생각으로 그가 묘사한 시간의 결을 더듬었다. 그러자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었다.
내 얼굴 위를 지나는 속삭임,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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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내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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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소리, 양철 부딪는 시끄러운 소리.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아이들 목소리는 선명했다가 희미했다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이내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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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탄자가 보인다. 검은색, 흰색, 갈색으로 짜인 양탄자다. 나는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쓰며 양탄자를 응시한다. 하지만 다시 어둠이 내린다. 26p
아름다웠다. 내가 쉽게 지나치고 마는 일상의 시간이, 벅차오를 만큼 뜨거웠다. 마틴이 온 마음을 다해 곱씹어온 시간은 기록으로 새로운 모습을 했다. 마틴의 이야기는 메건 로이드 데이비스가 함께 썼고 번역자 이유진이 옮겼다.
책의 맨 뒷장, 정보가 쓰인 곳을 보다가 이름 하나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백도라지’. 편집기획을 맡은 이 중 한 명이었다. 백남기 농민의 따님이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이야길 들었던 게 기억났다. 잊을 수 없는 이름이어서 눈에 띄었다. 찬란한 마틴의 이야기 끝, 무기력한 시민이었던 내 모습이 생각나 끝내 코끝이 시큰해졌다.
또다시 4월이다.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을 헤아려 본다. 기록만이 시간을 온전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엇을 기록하려 하는가. 내가 증명하고 싶은 것, 내 삶의 증거로서 만들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어떤 것이라도 추악한 사실과 거대한 진실 앞에서는 힘없는 글이 될 테지. 그런 생각으로 한결 가벼워지면서도, 무거운 마음의 추가 나를 저 밑으로 가라앉게 한다.
눈을 번쩍 하게 만드는 제목입니다. 환자의 처지, 좌절, 극복의 스토리도 드라마틱하지만.. 보호자의 노동과 고통도 떠올리게 되네요.
엄마는 다른 형제자매에게 안 좋은 영향이 있을까봐 마크를 요양기관에 맡기자고 하고, 아빠는 집에서 지냈으면 하고, 의견 충돌 때문에 싸우는 모습이 슬펐어요. 두 사람 모두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었을 테니까요.
글 읽어 주시고, 리스팀까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먹먹하게 만드네요
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고 한편으로는 벅차오르기도 했어요.
한 번 읽어 보셔도 좋을 거예요^^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이런 좋은 글 앞으로는 자주 봤으면 좋겠어요 ㅎㅎㅎ
돌직구 칭찬에 몸 둘 바를... 에빵님 대학 시절 별명이 하나씩 떠오르는데요ㅎ
글 자주 써 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ㅎ
ㅜㅜㅜ 글만 읽어도 눈물이 날거ㅜ같네요. 엄마 입장에서 읽게 될거 같아여. 책 소개ㅜ감시합니다. 항상 타인의 불행을 내 행복의 조건으로 가져다 놓으면 안되지만 그렇지
아니한 상황과 환경에 감사함도 느낍니다. 최근 타계한 호킹박사 이야기와도 겹치는 것이 굉장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실 호킹 박사 추모 글에서 보고 이 책을 알게 됐어요..
저도 타인의 불행을 나의 다행으로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아무래도 제게 주어진 온전한 무언가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도 생기더라고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애플포스트님의 글은 언제나 사유할 거리를 주네요
제목부터 쿵하고 내려앉았어요...
잊지말아야 할 날...
마음을 울리는 칭찬이네요 ㅜㅜ 감사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날이 더는 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은 의미로 기억하고 싶은 날만 펼쳐지면 좋겠네요. 우리 모두에게요.
흥미로운 책, 흥미로운 리뷰입니다. 이 책이 무척 보고 싶어졌습니다. 분명 애플님의 글이 제 마음을 끌어당긴 겁니다.^^
ㅎ 이 책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샀어요. 언제 가족과 함께 나들이 가실 때 찾아 보셔요.
글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
저는 '내가 너라면' 이라는 가정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배제합니다. 그런 가정으로는 절대로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심상이라고 할까요? 게다가, 입장을 서로 바꾼다고 한들, 실제로 그 당사자가 상대방과 같은 상황에 처했던 '경험'이 없다면 단지 '그럴듯한' 처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고요.
오랜만에 보는 applepost 님의 글, 언제나 그랬듯이 가슴을 울리네요.
그러게요. 좀 더 겸허한 자세로 살아야겠단 생각을 해 봅니다.
무엇보다, 가슴을 울린다는 칭찬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행복한 날로 보내시길 바라요~~!
엄마를 원망하지않고 이해하고 받아들인 마틴의
정신 상태 때문에 지금의 마틴이 있지않나 하는 생각
이 드네요 제목에서 부터 심쿵 했어요
어떤 처지에 있든 본인에 의지가 중요한것 같아요~
그러게요. 마틴은 정말 생에 대한 의지로 충만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읽는 내내 슬프고 마음 아프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희망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종종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기록을 하는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함과 잊기 위함이 묘하게 공존하는 것이라고. 저는 전자의 용법만큼 후자의 용법을 지지합니다. 삶의 진실과 세계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순간, 오롯이 내 삶에 담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다가오면, 지금의 내가 이러한 광경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하더라도, 훗날 언젠가 다시 소화시키기 위해, 그래서 내려놓기 위해, 기록을 하곤 합니다.
반가운 화답이 왔네요. 어제를 잊지 않기 위해 또 잊기 위해, 오늘을 충실히 바라보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해하기 위해 기록해 보려고요. 감사합니다^^
눈에띄는 제목이네요~
눈에띄는 제목이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