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게임 이야기. 그 중에서도 좀 과거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흔히들 와우라고 부르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는 방대한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와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 세계관을 정리하려던 시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워크래프트 RPG라는 책으로, 워크래프트 캐릭터들을 가지고 TRPG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설정집입니다. 와우저들에게는 속칭 룰북이라고도 불린 책이죠.
이전 시리즈 작품이었던 워크래프트3가 전략 게임이었던 데 반해서 와우는 MMORPG게임이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블리자드가 와우를 만들기 이전에 워크래프트를 RPG게임으로 만드는 시도를 한 결과물들이 이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워크래프트 RPG가 2003년에 출시되고 나서 이후 2004년에 와우가 출시되었죠. 마치 와우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까요.
물론 이 책들이 여러 가지 껄끄러운 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워크래프트 RPG의 자체 룰을 만들기보다는 TRPG의 유명한 룰인 Dungeons & Dragons 3rd의 d20(20면체의 주사위를 굴리는 룰을 말합니다.)을 기반으로 설정을 짰기 때문에, 여러 플레이어 직업의 죵류나 마법의 사용 방식 등이 지금의 와우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던전 드래곤의 위자드들은 아침에 마법을 메모라이즈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지금 와우의 마법사들에게 그런 과정은 필요가 없죠.
그럼에도 와우의 프로토타입 답게 와우가 초창기에 어떤 세계였는지를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책이고, 실제로 와우에도 꽤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와우 내의 신들이라고 불리는 티탄 판테온들의 세세한 설정이 처음 공개된 것도 이 책이었습니다. 10년이나 더 지난 지금 군단 확장팩에서 모습을 드러낸 최종보스 취급을 받던 살게라스는 룰북에서 나오던 고리발을 실제로 들고 나타났습니다. 다른 티탄인 아그라마르도 테샤라크를 들고 나왔죠.
<Shadows & Lights에 실린 살게라스의 일러스트. 군단에서 이 자세를 직접 보여줬습니다.>
반면에 룰북과는 많이 달라진 설정도 많습니다. 티탄 판테온의 다른 멤버였던 노르간논의 유물인 노르간논의 원반은 룰북에서는 아주 강력한 마법사용 아이템이었습니다. 카드가 정도의 마법사가 사용한다면 마법을 마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던 사기급 아이템이었죠. 하지만 지금 와우에서 노르간논의 원반은 그냥 단순히 아제로스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는 기록용 아이템에 불과합니다. 옛 설정과 지금 설정이 달라진 부분 중 하나죠.
<룰북에 실린 노르간논의 일러스트. 옆에 끼고 있는 것이 노르간논의 원반입니다.>
이러한 설정 변경들은 비판을 많이 듣기도 했지만 와우가 10년도 더 진행된 게임이 되면서 세계관이 확장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났던 일입니다. 물론 설정 붕괴가 일어난 것에는 블리자드가 실수로 일으킨 일도 제법 있습니다. 당장 첫 확장팩이었던 불타는 성전에서도 세계관 책임자였던 크리스 멧젠이 기억을 잘 못하는 바람에 에레다르 설정에서 실수로 설정 충돌을 만들었었죠. 이런 부분에서는 개발자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이런 변경들이 계속 게임을 재미있게 제공할 수 있는데 필요하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시점에 멈춰져 있는 패키지 게임과는 달리 온라인 게임은 계속 서비스를 하면서 변화를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한 시점에서 멈춰 있었다면 와우가 지금처럼 오래 사랑받은 게임이 되긴 힘들었을 겁니다. 사실 계속 만들어온 콘텐츠의 분량은 와우만한 게임도 많이 않을 겁니다.
저 또한 지금까지도 와우를 계속 즐기고 있는 와우저 중 한 사람으로, 지금의 와우도 좋지만 때로는 과거의 즐거웠던 순간이 가끔씩 떠오르고는 합니다. 힐스브래드 구릉지에서 상대 진영에게 죽어가면서도 계속 퀘스트를 진행한 적도 있었고, 처음 레이드를 시작하며 화산 심장부에 들어갈 때의 두근두근했던 순간은 지금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워크래프트 RPG는 그런 예전의 와우 초창기 순간을 추억하게 되어서 지금도 가끔씩 꺼내보는 책들 중에 하나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할 게임들에서 놀라운 세계관과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