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은 의식의 의지로는 억압되거나 의지로 강압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대개 일시적일 뿐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의식의 빚은 상환되게 마련이다. 무의식이 의식에 의존한다면 통찰과 의지로도 철저하게 무의식을 이겨나갈 것이고 우리의 정신계는 남김 없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세상 모르는 이상주의자, 합리주의자와 그 밖의 광신자만이 이와 같은 것을 꿈 꿀 것이다. 정신이란 결코 인위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이며 그것은 기예, 학문, 인내로써 어는 정도는 변화시킬 수 있지만 수공품을 만들듯 바꿀 수는 없는 것이며, 그렇게 하면 어쩔 수 없이 인간 본성에 깊은 상처를 입히게 된다. 인간은 한 병 든 동물로는 개조시킬 수 있어도 꾸며낸 이상형으로 바꿀 수는 없다.
(융 기분저작집 9 인간과 문화, p113, 솔)
살아가면서 같은 것을 자주 반복합니다. 여러 번의 반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겨우 조금 바뀝니다. 하지만 바뀐 것조차도 나중에 보면 비슷한 것의 여전한 반복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제 안에 자리한 습성이 참으로 질기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습니다.
불혹을 한참 넘기고 왜 이리도 귀가 얇을까를 원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공자에게는 한참을 미치지 못 하니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이죠.
한 해 한 해가 가며 욕망은 더욱 정교해집니다. 욕망대로 되지도 않거니와 생각지도 않은 일마저 겪게 되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지도 모릅니다.
욕망은 의지이자 동시에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본능은 어쩌면 생존과 종의 보존, 단지 그것만인 듯 합니다.
제한된, 혹은 독특한, 그러니까 단지 그 순간, 유일무이한 그 환경에서 전 그 본능에 충실했을 겁니다. 의지가 아직 싹이 트기 전, 의식은 했으되 세상을 잘 모르던 그때, 그래서 전 욕망했을 겁니다. 유일무이한 이 환경이 입맛대로 바뀌기를.
그러고는 의식이 의식되고 의지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욕망은 더 견고해졌습니다. 저를 채근해서 환경을 입맛대로 바꾸라고. 그러면서 대개의 경우, 저는 못 마땅한 존재였고 언제나 싸워 이겨내야할 적이었습니다.
본능이 그렇게 연장시키고 보존시키고싶어 했던 제가 말입니다.
비록 욕망을 정교히 하곤 있어도 결국 제 의지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어제의 생각을 오늘 또 잊고 있었다는 것을 이 글을 읽으며 다시 깨닫습니다.
아주 가끔이지만 내버려두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전보다는 다소간 노심초사가 줄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이가 들으서인지
내버려두기도
점점 많아지는 거 같아요
제 경우는 내버려두는 건지 체념인지 모를 때도 많긴 합니다.
늘 잊지만 다시 깨닫는 반복이지만
저도 전보다는 노심초사가 줄었구나 하고
한번씩 느껴질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요^^;;
제 경우는 물론 또 무슨 일이 닥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튼 다행입니다. 제주도 더위에 물 들고 있겠지요?
이전엔 자기를 채근하는 노심초사가 잘 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진보란 이성정교에서 그렇게 믿었을 거 같아요. 요즘은 조금씩 내려 놓고 있습니다.
몸에 밴 어린 시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