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담은 십자가 (벧전7)
찬송 : 찬205장(주 예수 크신 사랑)
본문 : 벧전 2:11-17절
고난주간 둘째 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무도 원하지 않으시는 심지어 제자들도 원하지 않는 그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발자국을 묵상해 보는 아침이다.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단 하나도 없으신 분이 그 길 밖에는 인류 구원의 길이 없기에 스스로 십자가의 길로 걸으신 예수님을 묵상한다. 그 어떤 단어로도 이해가 되지 않고 오직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서만 이해되는 그 길 ...
누군가 십자가를 지는 액션을 따라한들 그것이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재현할 수 없다. 진정한 십자가는 사랑을 담길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수많은 정치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법을 만들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강의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들은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에 십자가는 없으며, 반대로 십자가를 지는 이들이 있지만 거기에 사랑은 없고 투쟁만 있는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 어떤 대가도 없이 오히려 수치와 저주와 고통만 있는 십자가를 사랑으로 짊어지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 삶 ...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오늘 고난주간 둘째 날 십자가를 투쟁이 아닌 사랑으로 짊어지며 그 어떤 대가를 거부하고 십자가로 그침을 받아들일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오직 예수님이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날이 되기를 원한다.
이 날 주님은 어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배우도록 하실까?
본문에는 사도 베드로가 거류민과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을 막으라고 외치고 있다. 15절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오늘 대한민국은 넘 소란스럽다. 이유는 전 정부를 적폐라고 몰아낸 정부가 전혀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교회가 왜 세상에 뭇매를 맞고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십자가 사랑을 통해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사랑의 십자가가 이제는 대가를 챙기는 십자가가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세상이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순전한 사랑이 아니라 숫자를 더 늘리기 위한 전도라고 세상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나부터 예외이지 않다. 어쩌면 나부터 주범일 것이다.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을 힘입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고 그 기쁨을 누렸지만 아무 대가없이 받은 그 사랑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나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가를 챙기려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오늘의 사역에서 대가없는 사랑의 예수님 십자가 사랑을 백분의 일, 천분의 일이라도 실천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내 힘으론 이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 자식에게도 대가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얄팍한 사랑, 죄로 물들어버린 사랑이다. 짐승들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하지만 죄로 물들어 버린 인간은 자식에게조차 대가를 바라며 사랑을 주는 존재이다.
이런 내가 오늘 고난주간 둘째 날 대가없는 사랑을 실천하기를 결단해 본다. 나를 비방하고 악행을 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십자가 사랑이라고 한다. 12절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 시대 교회를 오해하면서 비방하고 핍박하는 이들을 미워하고 대항하려는 시도가 왜 없었겠는가? 그런 때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오늘도 교회를 향하여 정말 무섭게 비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에 우리도 정당한 대항을 하고 싶다. 그러나 고난주간 둘째날 주님은 진정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적 대항이 아니라 선행으로 무식한 말는 대항이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16-17절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여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여기 뭇 사람은 아마도 그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놓는 이들을 말할 것이다. 이들을 공경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믿음의 사람들속에는 사랑으로 서로를 붙들어 주며 왕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고 하신다.
오늘 이 말씀은 이렇게 변질되어 있다.
‘너희는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사용하며, ... 뭇 사람을 미워하고, 형제와 경쟁하며 다투고, 권력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무시한다.’
내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늘도 나의 삶의 참 주인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나의 삶 전부를 아시며 나를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그분의 나라에 그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이 하루 그분의 종으로 이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
여기서 정말 쉽지 않는 부분이 예수 믿는 자들을 오해하며 억울하게 죽이려는 법을 만들고 죽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존대하라고 외친 이 말이다. 정말이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존대일까?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하며, 뭇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대하여야 한다.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죽여서라도 구원해야 할 소중한 영혼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
오늘 진심으로 만나는 분들을 존경하며 동역자들을 경쟁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며 세워드리는 자로 서기를 결심해 본다. 이 모든 일에 왕이신 하나님앞에 서 있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일을 실천해 본다. 이 땅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이 세우신 소중한 분들로 존대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련다.
주님은 세상의 악법과 권위에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었다. 하늘 군대를 동원하여 세상의 군대를 초토화 시킬 수 있으며, 아니 말씀 한 마디로 그들의 군대를 거꾸로 행진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하나님이 왕이심을 알기에 겸손히 그 불법의 재판을 따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이것이 왕을 존대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이란 시간 주님의 그 길을 조금이라도 따라가는 날 되기를 소망한다. 주님, 오늘 이 종이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주님을 닮게 하소서.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통치자임을 믿기에 뭇 사람도 왕도 존경할 수 있는 마음이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