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에서 두려움을 많이 느껴.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초라하고 작아지는 느낌이 들어.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우리 힘으로 날아오르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들지. 그리고 조그마한 이득에, 조그마한 안전에 자신을 맡겨버려. 자신에게 반응하는 것들, 그 거울에 만족하며 안주하려는 게 사람이야. 그건 적어도 두려움을 주지 않으니깐.
가난한 사람들이 왜 더 보수적인지 알아? 두려움때문이야. 더 잃지 않으려는 마음때문이야. 그래, 경제적인 불평등에 대해선 가난한 이들도 진보적일 수 있어. 하지만 사회적 차별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야. 자기 일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빼앗기보다는 차별적이더라도 그 안에 있는게 낫거든. 자기의 정체성을 만드는 종교적, 사회적 가치를 버리기 보다는 그 가축 안에 있어야 안심이 되거든. 위안을 줄 수 있으니깐. 그 무리안에서는 말야. 번식전략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다른 성전략에 대해 개방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이야. 그래야 짝을 안정적으로 찾을 수 있으니깐.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때문이지. 그런데 이 자기라는 게 두려움때문에 점도 강화되거든. 좁아지게 되거든. 사실은 더 큰 자기가 있는데 두려움때문에 거기에 가지 못하는 거야. 거기에 가려고 하면 거세당할 거 같기 때문이야. 모난 돌이 정맞을 거 같기 때문이야. 그래서 눈치를 더 보게 되는 거야. 사회적 지위가 낮은 유인원이 더 스트레스 호르몬이 많이 나온다고 하잖아. 무리에서 자기 평판이 낮아지면 짝짓는데 불리하니, 눈치를 보는 거야. 안 당할려고. 그러다 보니 그 범위 안에서 살게 되는 거고, 비겁해 지는 거지.
상징계의 언저리에 가면 항상 두려움이 나타나. 자기가 소멸될 거 같은 두려움 말야. 동물적인 식물이, 식물적인 동물이 될 거 같은 두려움. 그러나 그 단계를 넘어서면 자기가 없어져. 엔드류 뉴버그 같은 뇌과학자는 우리 뇌에서 자아를 담당하는 곳에 감각정보가 흐르지 않게 된다고 해. 즉 시공간 안에 정위 되어 있던 자아가 없어지는 거야. 이 것까지 가는 동안은 끊임없이 쾌와 불쾌 그리고 현실 속에서 쾌를 얻자는 프로이트 경제학의 유혹에 굴복하면 안되. 일단 넘어서야해.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새로운 상징계를 만들어야 하는 거야.
한강의 체식주의자에서 형부 생각나? 상징계의 경계까지 갔지만 결국 도망갔던 인물. 그는 두려움에 진거야. 쾌와 불쾌의 경계와 현실원칙에 지게 된 거지.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깐. 자아를 벗어난다는 건 그 만큼 책임을 지는 거야.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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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thank's you very very very very much
늘 그림도 멋지고 글도 좋아.....^^
그래 부딛쳐 봐야지 앞에 무엇이 있든
삶에서 두려움이 가장 큰 적이지.
그 소소한 두려움들에 억눌려 자유를 잃게되지
자유롭게 살아야지 결심하게 되는 글이군.
에른스트 그림인가?
르네 마그리트 그림이야, 아른하임의 영토~~~^^
솔직히 말씀드려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평소에 지나던 길에서 처음보는 길로 빠지는 느낌의 글이네요.
^ 옆길로 산책해도 좋지요.
전에 포스팅했던 그림의 다른 버전인가요? 얼핏 같은것도 같은데 다른느낌이군요.
같은 그림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 다소 다른 색채로 돌아다니더라구요. 다른 버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