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 역사를 왕을 중심으로 개괄해낸 베스트셀러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은 초등학생이 읽어도 재미를 느낄 만큼 친절하다. 과거 조선 왕들의 모든 언행을 소상하게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이것을 차례로 쌓아 올리면 아파트 12층 높이가 된다. 압도적인 분량만큼 일반적인 접근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루에 100쪽씩 읽어도 4년 3개월이 요구된다. 이처럼 개괄서의 장점은 평소에 접할 수 없는 것들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있는 반면, 어느 정도 작가의 의도대로 편집됨으로써 독자들에게 균형 잡힌 시각보다 편향된 시각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단점이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까지 왕을 중심으로 총 27편의 압축된 드라마가 펼쳐진다. 본래 조선왕조실록의 원전은 민초의 삶까지 적나라하게 적혀있다고는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백성이 아닌, 바로 조선의 왕이다. 왕의 탄생과 배경, 그리고 다른 왕들과 차별화되는 업적들을 조망하고, 이는 곧 왕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21대 조선의 왕이자, 조선 최초의 유일한 천민 출신으로 가장 오랜 시간 왕의 권좌를 누린 영조가 대표적인 데,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은 유명하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조선을 배경으로 제작된 드라마나 영화가 소개되는데 기회가 된다면 관심 있는 것부터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의 한 가지다.
기존의 생각과는 다르게, 조선 500년 역사는 몇몇 사건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평온한 시대였다. 물론 조선 말기 외세의 침략으로 굴욕적인 식민화를 겪었지만, 그 이전의 조선은 무려 500백 년 동안이나 매우 평화로웠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지속된 장기간의 평화가 결국 조선의 멸망을 자초했다는 점이다. 좁디좁은 한반도 위에서 지속된 평화는 역설적으로 내부 소모전을 촉발시킨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왕권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는 두 파간의 갈등은 결과적으로 국력을 약화시키고, 분열시켰으며, 이렇게 전복된 왕권은 언제나 반대파를 숙청하는 열등한 짓을 저질렀다. 이런 짓거리가 500년 동안이나 반복됐으니 외세의 침략에 한 나라가 파멸의 길로 접어든 것도 그렇게 억울한 것만은 아닐 터이다.
역대 조선 임금들의 계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세습으로 시작해서 세습으로 끝나버린, 세습의 흑역사란 점이다. 한 나라와 백성을 대표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능력이 부족한 자식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운이 좋으면 성군이 고, 운이 나쁘면 폭군이 되는 상황인 것이다. 조선의 운명을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500년간 반복된 조선의 제비뽑기는 세종대왕과 연산군을 등장시켰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조선 최초의 천민 출신이었던 영조는 결코 조선이란 나라가 관대하거나 평등해서가 아니라 철저한 세습이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습 행위는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라는 토인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장점은 중간중간에 조선왕조실록의 원전이 한 번씩 소개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데, 그 글솜씨가 매우 훌륭하다는 점이다. 오래전에 쓰인 문장이지만 제법 잘 읽힌다. 정종실록의 일부분이다. "내가 한양에 천도하여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날 환도하였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도다. 그러므로 출입을 반드시 밝지 않은 때에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여야겠다." 비록 현대 문법에 맞게 재해석된 부분이 없진 않겠지만, 글쓴이의 노고의 흔적과 직업에 대한 프로 의식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조선의 일등공신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아닌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선조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조선의 임금들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500년 동안 충실히 기록하고 보관해온 선조들의 열정과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의 과거는 있어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책 속의 한 줄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기에 격식을 어기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러한 이유로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일성록, 정조3년 -Page. 434-
참 대단한 강사에요. 이해가 잘 되더라는...
댓글 감사드립니다! 설명력 120%죠 ^^
즐거운 스팀잇 생활하시나요?
무더위야 가라!!!!
댓글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팀잇 생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