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

in #humanities7 years ago

당시에는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국제정세의 패권을 장확하고자 대륙을 불문하고 여기저기서 군대를 앞세워 다른 국가의 영토나 주권 그리고 심지어는 문명의 발전을 상징하는 문화재들을 약탈하고 수탈하는 이른바 제국주의 사상을 표본으로 하여 타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 시키는 한편 식민지배의 확장에 열을 올리는 그러한 시대였다. 또한 이들은 전쟁을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성공적인 군사활동을 수행시키기 위해 양질의 군수물자를 확보해야만 하는 자신들만의 당위성을 갖었었고, 이를 위해 이미 점령한 타국의 자원을 착취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충족시키는 한편 이를 통해 또다른 침략의 동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Rousseau 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자연상태에서의 보호주의 혹은 보호본능이 유발하는 분쟁인 것이었으며 제국주의의 발전과 그에 따른 말로는 보호주의가 스스로서 변태하여 발전한 이기적 그리고 비이성적 폭력이었던 것이다.

''종군위안부'' (일본식 표현) 를 말할 때라면 그들은 항상 위안부대를 조직하여 위안소를 운영한 것에 대한 당위성 (나는 이를 자기합리화를 위한 이기적이면서 비이성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을 이렇게 피력한다 : '' 당시에는 ''니뽄'' 뿐만이 아닌 세계 여러나라들이 다 그랬으니까, 후의 베트남 전쟁때 한국군도 베트남 여성들을 대상으로 이와 같은 맥락의 일들을 도덕적 헤이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 ''., 한때 무능했던 정권과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은 이들로 인해 잠시나마 자국의 주권을 빼앗긴 민족의 한 후손으로서 부끄러움과 함께 치욕스러움을 감출 수 없으나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토대로 본다면 위안부대의 운용은 그들만의 당위성과 함께 합리화 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합리화는 갖을 수 있겠으나, 정의의 관점에서 보는 시각에서의 정당함에 대해서는 부당하다 말하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말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당함은 무엇으로 부터 가능한 것인가? 과연 한 인간이 어느 한 인간을 모종의 계약을 통해 소유할 권리를 갖을 수 있는 것인가?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노예제도와 같이,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이, 또는 현대의 자본을 통한 신체의 특정 부위를 빌려주고 내어주는 인간 신체의 소유권 일체의 전이등 이러한 것들이 과연 어떻게 가능 한 것이가? 위안부라는 이름의 자발적, 반강압적 혹은 강제적으로 동원된 ''매춘부'' 인가 아니면 ''성노예'' 인가? 즉 내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소유의 관점에 입각한 위안부 문제의 본질적 문제인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의 생체, 다시말해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란 무엇인가? 사체와의 대조점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자연의 살아숨쉬는 모든 생명의 생체들은 저마다 각자 특정의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상징을 갖고 있다. 만약 이와같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들의 사체와의 다른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죽은 미이라를 두고 연구하여 옛날 역사속의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시도를 예를들어 말하자면 미이라를 이지적 방법으로 부활시켜 이러한 상징을 갖게 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은 전혀 관념적 확대해석이 아닌 오히려 감각적 생체로서 설명되는 인간의 몸이 갖는 상징을 연구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그렇다, 정신분석학자들과 행동연구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상태라던지, 본능이 이끌어 내는 반자동적 행동, 혹은 생태연구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세포의 결합에서 요인하는 유기적 역활등을 토대로 인간의 감각적 생체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도 분명 살아있는 생체를 기반으로서 밖에 이루어지지 않지 않는가. 그러므로 어느 한 생명의 생체는 단순히 자신의 생과 사의 관계를 나누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앞서 말한 여러가지 상징들을 수반할 수 있게끔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그것에 관한 보다더 깊은 고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징성을 갖는 몸을 우리는 어떠한 모종의 계약을 통해 타인의 그것을 사유화 하여 자신들의 필요와 구미에 맞게, 또한 어떠한 쾌락이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할 권리를 갖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 한다면, 그러한 권리는 무엇으로부터 얻어지는가? 국가의 이익과 안녕을 이유로 강한 구속력을 공포하는 국가로부터 요구되는 개인의 맹목적 희생과 인권유린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아울러, 우리한국사회에서 자주 옅보이는 일들로서 인간을 그리고 그의 존엄과 가치, 즉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갖는 도덕적 상징을 내포하는 인륜적 가치들을 물질적 보상을 핑계삼아 돈과 지위 또는 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아주 쉽게 유린하는 일들은 정녕 정당한 것인가? 그런데, 우리(법적 인격체로서의 나)는 과연 우리 자신(내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끔 하는 모든 요소들 : 이를테면 자신의 신체, 재능, 사고의 깊이 혹은 자유 등등) 에게 있어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또한 자의로서 자신을 타락으로 내몰거나 또는 포기하는 일들이 짐짓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

''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갖을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을 갖는다 함은, 자유로운 의지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의지로서 자신을 소유할 줄 모르면 직접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그 자신 스스로의 소유주가 되길 원한다는 것으로 달리 말해진다. 이처럼 인간의 속성을 말한다 함은, 그것은 자신을 자기것으로 삼고자 하는 점유를 말하는 것이고, 다시한번 말하자면 자유의 의지를 말한다. 여기 외적소유와 내적소유가 있다 ; 외적소유라 함은 물질들을 바탕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며, 즉 자신의 외적 소유물들로 갖게되는 자아를 말하며, 내적소유라 함은 자신의 재능, 교양, 교육 혹은 종교적 가르침 등으로서 갖게되는 자아를 말한다. 그러나 법적속성의 나라는 이가 스스로서 자신을 점유하여 제어한다 하더라도, 예를들면 자신의 신체, 재능, 지능, 자유 등을 자의로서 어떠한 방법으로 내몬다 할 때, 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사람으로서의 그)와 그의 육체 사이에는 항상 하나의 직접적이고, 단순명확하며, 그리고 순전한 정체성이 존재하는데, 이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람으로서의 자신과, 주체로서의 자신이 구분된다. (주체라는 것을 주관적 개체라 본다면 그 개체가 갖고 있는 고유의 또는 주관적 특성들을 바탕으로 주체라는 개념이 스스로 형성되지만, 사람으로서의 자신은 자의식의 성질로서, 자의식이 육체를 가진 자신을 인식하여 엄습해 소유함을 말할 수 있겠다, 즉 자의식을 같고 있음을 말한다) 이때문에 인간은 그와 동일한 의식의 성질을 가진 어느다른 인간의 몸을 겁탈하거나, 유린할 수 없으며, 자신 또한 내적소유인 자신을 마치 자신의 차량을 내다 파는 것 마냥 타인에게 자신의 소유 일체를 넘길 수 없으며, 빌려주거나 혹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거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예제도가 허락될 수 없는 것이다 ''. - Hegel -

앞서 헤겔의 소유의 관한 해석에서 본 것처럼 인간소유의 논쟁에서 인간이 인간을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가당치 않는 일인지 명확히 인지하여야 한다, 설사 그어떤 계약이 그 이면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한번더 피력하고자 하는 것은 제아무리 어떠한 개인이 자의를 바탕으로 자신의 육체를 내어주거나, 자해한다 하거나 혹은 이와 같은 무언가의 일들을 계획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그러한 시도들을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의 어떠한 특정 권리를 부여하여 무분별하게 횡행되는 것을 주의깊게 견제하며 신중한 태도로 이를 바라봐야 한다.

여기 한 웹페이지를 링크 해 놓겠다.

http://east-asian-peace.hatenablog.com/entry/2015/02/12/200255

글의 서두에서부터 공표하였지만, 필자는 사실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그 문제가 갖고 있는 본질적 오류를 인간의 육체와 그의 소유권에 입각해 풀이해 보고자 하였다. 필자가 이러한 사유를 하게 된 계기를 간략하게 말하고자 하는 이유는, 필자는 이 문제를 놓고 주위의 꽤 많은 일본인들과 많은 토론과 언쟁을 해 본 경험을 토대로서 그들이 갖고 있는 심각한 오류들을 들춰내고자 많은 고민끝에 결국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서 문제제기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박유하씨의 ''제국의 위안부'' 에 대한 어떠한 비판을 하고자 한다면, 제국의 위안부의 기술적 서술이 아니요, 역사적 사료의 시시비비 또한 아니요, 그것은 박유하씨의 주관적 확대해석이 불러일으키는 허구적 상상과 그것을 위안부 할머니 당사자들이 역사적 사실로서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마음의 상처들을 마치 한낱 추억에 빗대어 동일시 한 시도가 얼마나 잔인하고 부당한 폭력인지를 규탄하는 차원에서 글의 말미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걸어놓는다. 한 인간의 사고의 초라함이 얼마나 큰 무지를 낳고 그로서 또 어느정도의 사회적 혼란을,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얼마만큼의 상처를 남기는지 오늘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그리고 이에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

‘' 인간의 생 혹은 삶의 이야기의 크기는 내가 축소시키고 편집할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의식 안의 좌표에서 일어나는 초월적 경험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타자의 얼굴로서, 나는 어떠한 방법들로도 이를 축소하거나 왜곡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타자의 얼굴은 내가 살피며 나눠야 할 고뇌 혹은 고심이며, 내가 들어야 할 누군가가 전하는 메세지 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향하는 요구 혹은 요청으로서, 나는 그것을 내가 알고 이해하는 그리고 계획하는 나만의 영역으로 함부로 끼워 맞출 수 없다, - Emmanuel Levinas ‘’.

글을 마치고자 한다. 위안부의 본질적 문제는 자신들의 당위성을 합리화 하려는 일본이 온갖 방법들을 동원해 중국의, 베트남의, 네덜란드의 그리고 조선의 여자들을 계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점령하고자, 소유하고자 그리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충족시키고자 하였던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용인할 수 없는 부당한, 파렴치한 죄악이었음을 나는 규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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