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토록 '밝은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
요아(@hyunyoa)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다룬 글이라면 빠짐없이 손꼽히는 특징이 있다.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에 나는 홀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매사 긍정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아무리 밝은 사람이더래도 우울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하면 금세 우울해질 걸?' 그러니 긍정적인 얘기만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기적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자신이 듣기 좋은 말만 듣기를 원하는 거 아닌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위로할 마음도 없는 게 분명하다. 사람이라면 어두운 면도 밝은 면도 반반씩 있을 텐데, 밝은 얘기만 원하면 그거야말로 그 사람의 면모를 모두 수용하지 못하는 이로 느껴지기도 했다.
심리상담 선생님의 말도 이 가치관을 갖는데 일조했다. "우울함이 찾아왔는데 이를 거부하려는 사람은 건강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우울이 찾아왔음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방법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이런 감정은 없다고, 슬픈 감정에 젖은 자신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가끔 그렇게 밝은 삐에로 같은 사람을 볼 때마다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 이게 다 저런 제목을 달고 쓴 글들 때문이니까.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인간의 특징-이라는 대서사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우울한 사람' 말이다.
너는 매일 우울한 얘기만 하니까 친구가 없잖아.
고등학교 단짝이 내게 건넸던 이 말을 뒤로, 나는 총 세 단계의 스텝을 밟았다.
- 맞다, 그래서 내가 친구가 없는 거겠지 라며 자기 한탄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저렇게 얘기를 못할 것 같은데, 친구가 맞나? 라는 물음
- 그래 결국 쟤는 친구가 아니었어, 절교
"우울한 얘기를 싫어하는 네가 이상한 거야,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는 관계의 온점을 찍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어른이 되었다. 누군가 우울한 얘기를 꺼내면 주변인들이 말을 돌리려는 분위기를 보여도 나는 눈을 맞췄다. 상대방을 위로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너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우울을 꺼내어 나눌 수 있는 튼튼함을 지녔구나.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랬더니 심리 상담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지인들은 고민이 생기면 내게 연락을 청했다.
그런데.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다가, 문득 내가 예전 같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자꾸 웃음이 나오는 짤만 찾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울한 얘기보다는 재밌는 얘기에 눈이 갔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진지한 얘기를 그리는 이들보다는 유머러스하고 삶에 별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청했다. 예전엔 어떻게 저리 걱정이 없어서 어떡한담, 너무 태평한 거 아닌가? 싶었던 내가 지금은 그런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우울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끝도 없이 비관하는 사람들은 굳이 마음을 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쪽을 택하고 있었다. 내게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나까지 밝은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거지? 말도 안 돼, 세상에 밝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종이를 폈다. 같은 우울한 얘기를 하더라도 듣기 괜찮은 경우와 어려운 경우를 적었다. 결론이 나왔다. 바로 귀였다. 너의 말은 내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제를 둔 사람은 힘들지 않았다. 도리어 고마웠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다는 마음도 함께 생겼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뭘 했는지 모르겠고, 앞으로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나는 이제까지 헛짓거리를 하며 살아온 것 같아. 도대체 남들 할 때 왜 나는 아무것도 안 한 거지?"라는 말은 커피를 마셔도 체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웃고 넘길 수 있는 기분 좋은 뻔뻔함을 찾았던 거였다. 누군가 "에이, 뭐 …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말하면 예전에는 "아냐, 그렇지 않아. 우리 함께 방법을 고안해 보자."라고 답했다면, 지금은 "맞아, 어떻게든 돼! 우린 뭐든 된다!"라고 말하는 쪽으로 변했던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침에 눈을 뜨기 어려우니까. 조금이라도 행복 회로를 돌려야만 밥을 먹고 스트레칭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고등학교 친구가 전하려 했던 뜻은 그게 아니었을까. 나는 답 없는 질책을 연거푸 꺼내 놓는 아이였으므로. 단순히 '우울한 얘기'를 해서가 아니라, '답을 듣지 않으려는 우울한 얘기'를 해서 힘들었을 게 분명하다. 서툰 표현력으로 인해 우정이 끊길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이제야 진심으로 '밝은 척'이 아닌 '밝음'을 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내게 아픈 과거가 있음을 몰랐다고, 풍족하고 다정한 환경에서 잘 살아왔을 것 같다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의 뻔뻔함 지수가 생겼다고 장담한다. 불안이 흔들의자에 앉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행복도 흔들의자에 앉는 것과 같으니까. 행복해야 한다는 숙제를 덜어서 마음이 편하다. 모든 일에 있어 능청스러워지면, 자연스레 불안이 잦아드는 걸 익히는 중이다.
사람들이 밝은 사람에게 이끌리는 이유는, 바보 같을 정도로 뻔뻔한 태도와 아무리 무거운 일도 별 것 아니라는 어투의 즐거운 능청스러움에 반해서가 아닐까. 슬픈 얘기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러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전히 우울한 감정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므로. 이 글은 우울에서도 긍정적인 우울이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우울 마스터가, '우울한 얘기를 하면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음을 전하고 싶은 길고 긴 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