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만나는곳 주막의 역사

in #fun7 years ago (edited)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곳 주막의 역사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소통의 장소, 바로 주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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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신라의 김유신이 천관의 술집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주점의 형태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주점과 숙박업이 혼합된,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주막의 형태는 임진왜란 전후에 생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604년에 편찬된 <갑진만록>이란 책에는 주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당시 주막에는 술과 말먹이, 땔나무 정도만 있어서 여행자들이 필요한 생필품을 직접 가지고 다닌다는 내용인데요, 초기 주막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조 이후 화폐 사용이 증가하면서 본격적인 주막의 시대가 시작되지요.

주막은 전국에 고루 분포해 있어서 시골이나 도회지, 심지어 여행객들을 위해 길 한복판에도 존재했습니다. 일단 술과 식사,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본기능이겠습니다만, 주막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보의 중심지 역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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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주막이나 객주 정도를 제외하면 일반인이 쓸 수 있는 전문적인 숙박업소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주막으로 모였지요. 술도 파는 곳이니 이야기하기도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해당 지역 주민과 여행객들의 신분을 뛰어넘은 교류의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만약 마을에 주막이 단 한곳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의 주모는 마을주민들의 대모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가 신분제 사회이니만큼 잠자리까지 평등한 건 아니었습니다. 양반이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고, 지위나 권세가 없는 사람은 구석이나, 마루에서 자는 경우도 있었지요. 양반 여럿이 모인다면 따라온 하인들끼리 시비가 붙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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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관직에 있는 높으신 분들이 행패를 부리는 일도 존재했습니다. 출장 시 관리들은 보통 그 지역의 관청이나 말을 관리하는 ‘역’ 같은 곳에서 숙식을 하였지만 주막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일도 간혹 있었지요. 그냥 다 같이 사이좋게 마시고 자면 좋겠지만, 관리들은 으레 독방을 원했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날 투숙객들이 꽉 차 있는 상태라면 권력을 이용해서 투숙객들을 쫓아내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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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을 내세워 독방을 원했던 관리가 큰코다친 사례도 전해집니다.
조선시대에 교리 벼슬을 하던 어떤 양반이 첫 지방출장에서 신분을 내세워 한 방의 모든 투숙객을 쫓아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투숙객 틈에 신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묵고 계시던 판서가 끼어있었던 거지요. 참고로 판서는 오늘날의 장관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판서는 그 자리에서 교리를 꾸짖고, 후일 이 사실을 임금께 고해 파직시켰다고 합니다. 참으로 훈훈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그려.

이런 일화는 조선의 숙박업이 체계적으로 발전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들이지요. 조선은 주변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숙박업이 신기하리만치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요. 그 중 하나가 양반의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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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양반이 숙박사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지요. 조선시대 양반의 가계부를 보면 전체 수입의 1/3 정도를 접빈에 썼다고 합니다. 손님을 맞는데 연봉의 1/3을 썼다는 거지요. 한마디로 그 동네의 유력한 양반집은 일종의 호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손님이기에 그렇게 돈을 썼을까요? 물론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대개는 길가는 나그네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요. 옛날 동화나 야사 같은 걸 보면 많이 나오는 이야기지요? “지나가는 과객이온데...” 로 시작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요. 나그네들은 지나가는 고을의 유력한 집안에 숙식을 청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 집주인 성격이 놀부 같은 캐릭터가 아니라면 재워주고, 먹여주고, 덤으로 노잣돈까지 쥐어줘서 보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양반들이 이렇게 손님대접에 열심이었던 건 자신의 관대함과 인심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음으로 보입니다. 또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에 전국을 돌아다니는 나그네들은 좋은 정보원이기도 했지요.
사실 이런 실리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손님을 쫓아내는 건 양반의 도리가 아니었지요. 실제로 아직까지도 양반 종갓집에는 ‘봉제사 접빈객’이라는 단어가 남아 있습니다. 해석하자면 ‘제사를 지내는 것과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지요.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손님맞이를 중요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숙박비는 안 받고, 고을에서 가장 깔끔한 방에 재워주는데다가, 운 좋으면 식사도 공짜에 노잣돈까지 주는 호텔들이 여럿 있으니 숙박업이 발달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주막은 조선 후기에 번성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그래도 대한민국 건국 당시에도 존재한 업종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주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21세기 초입니다. 최후의 주막으로 알려진 ‘삼강주막’의 주모 ‘유옥현’ 씨가 2005년 별세하면서 주막의 역사는 끝이 났지요. 현재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해체 후 복원되었기에 옛날의 모습은 찾기 힘들답니다.

주막에 관한 3가지 재미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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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chul 님 역사를 또 파고드시네요. 재밌습니다. ㅎㅎ

ㅎㅎ 역사 알면알수록 흥미잇고 잼잇어요😊

이런 주제 글들이 제일 맘에 드네요!

아하! 그렇군요😀 맘에 드시다니 다음에도 역사에 대해 포스팅 할께요😊

오호 주막에 대해 많이 알고 갑니다 :)
좋은 정보 감사해요!!!

😊🤗잘보셧다니 감사하네여😍

재밋어요^^ 자주 보러 와야 겠어요!

아ㅎㅎ 감사 해욧😁 저두 자주 블로깅해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