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교회처럼 예배에 목숨 거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최근 서초구에서 3천억 원을 들여 아방궁같은 예배당을 신축한 교회가, 그렇게 럭셔리하고 호화스러운 예배당을 지은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그런 곳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환상을 즐기고 싶어서가 아닐까? 규모나 시설을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모든 교회가 웅장하고 럭셔리한 예배당을 소유하는 것을 꿈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교회에 다니면서 다른 교인들로부터 부러움을 온몸으로 받고 싶고, 자신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싶어서일 것이다. 교회의 하드웨어만이 럭셔리한 것은 아니다. 소프트웨어도 이에 못지않다.
엊그제 누군가가 필자의 카페에 자신들의 교회 예배실황을 첨부하면서, 그 예배를 통해 기쁨과 감격이 넘치고 있다고 적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짐작한대로 서울 강남의 유명한 교회에서 창단한, 율동과 찬양실력이 탁월한 찬양예배 팀이라고 세간에 인기가 자자하였다. 사실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대형교회에는 이렇게 뜨거운 찬양으로 감동의 물결이 넘치는 예배 팀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실황을 캡처하여 유투브에 올리거나 음반을 발행하기도 한다. 그래서 뜨거운 감동을 원하는 젊은이들은 이런 교회를 선호하게 되고, 찬양예배를 드리는 곳에 참석하여 감동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호주의 힐송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뜨거운 예배는 젊은이들만의 희망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예배자라면 누구나 감동적인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예배를 갈구하고 있다. 그래서 뜨거운 찬양으로 감동이 넘치는 기쁨의 예배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뜨거운 찬양으로 군중을 휘어잡는 곳에는 빠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드럼과 키보드가 동원된 심장을 쿵쾅거리는 악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거대한 음향시설, 현란하고 감동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조명시설, 그리고 기가 막힌 말솜씨와 추임새로 군중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팀 리더 등이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찬양예배에 참석하면 자신도 모르게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동의 물결에 휩싸이고 눈물이 솟는다. 그래서 물어보겠다. 그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인가? 물어볼 것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은혜가 넘치고 감격해 하는 상황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곳에서 주로 드리는 찬양곡은 작곡한지 이삼백년이 넘은 찬송가가 아니라, 기교가 현란하고 곡조가 빠른 CCM이다. 이렇게 웅장하고 럭셔리한 예배당에서 환상적인 조명이 어우러진 곳에서, 귀가 먹먹하게 드럼과 악기가 격렬한 찬양을 돕고 있는 곳에서, 자신도 이런 격앙된 분위기에 빠져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다면 환상적인 성도의 삶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에 대해 곱씹어보고 싶다.
하나님은 예배당의 시설이나 예배의 내용보다, 예배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1~17)
-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습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리던 장소는 그 유명한 예루살렘성전이다. BC957년 솔로몬이 부왕이었던 다윗왕의 소원을 이어받아서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했다. 이 시대의 어느 교회가 수천억을 들여 교회를 건축하더라도, 그 당시의 예루살렘성전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지었던 예루살렘성전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이 수많은 짐승을 제물로 드려서 제사를 드리더라도, 그들의 희생적인 제사행위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다. 기뻐하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다. 그들이 죄악을 행하면서 거대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고백하신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 이미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서 주일성수를 비롯한 수많은 예배의식에서, 과도하게 헌금을 드리고 열정적이고 성실하게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실 거라고 선포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네 교회처럼 예배의식을 많이 드리는 나라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네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으로부터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가? 거꾸로 지금처럼 교회가 욕을 많이 먹던 시대도 없을 지경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를 밥 먹듯이 지으면서, 예배의식에 참석해서는 뻔뻔한 얼굴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눈물을 흘리는 가증스런 모습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러 가기 전에, 형제와 불화한 사실이 있으면 먼저 화목하고 나서 예배를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네 교인들은 미움과 분노, 싸움과 분을 마다하지 않으며, 갈등과 불화 속에서 살아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죄악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형제들과 등을 돌리는 있는 원인이 무엇에 있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묻지 않으신다. 화를 내고 싸우며, 미워하고 증오하는 행위가 악하다고 말씀하실 뿐이다. 하나님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선포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죄인이 또 다른 죄인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정죄하는 것 자체가 가증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들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 티끌을 보고 지적하고 있다고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다.
-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모습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4,15)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당신은 어떤 행위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는가? 두둑한 헌금인가, 아니면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는 모습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주일에 두 차례의 예배와 수요일과 금요심야예배, 매일처럼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며 가정에서도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적지 않은 목회자와 교회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해온 예배행위를 훈장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증거와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며, 삶이 기쁨과 형통함으로 함께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수많은 예배의식에 참석해서 두둑한 헌금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역사과 은혜를 떠올리며 날마다 감사하는 백성들을 기뻐하신다. 넘치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할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감사할 수 없는 환경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감사대신에 원망과 불평, 짜증과 신세한탄, 낙심과 절망을 쉽게 받아들인다. 그런 생각과 말은 세상과 자신을 지으신 주인에게 퍼붓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감사하지 않으면서, 교회에 와서 예배행위를 근거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위선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는 자신의 암울한 환경과 비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떠올리며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언젠가 성령께서 필자에게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를 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다.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는 위의 구절처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기도였다. 그러므로 당신이 눈으로 보이고 피부로 느끼는 현실을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절대 선하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형통케 하심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감사하라.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모습이다.
- 가난하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모습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3,4)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고 선포하셨다. 그래서 당신은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인가?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날마다 애통하는 심정으로 속죄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교회에 나오면 그런 얘기는 들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므로, 그 공로를 의지해서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들떠서 말하고 있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구원을 얻는 통로를 만들어주신 것은 맞지만, 1분짜리 영접기도행위를 하고 일요일에 한 시간짜리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구원이 확정되었다고 선포한 적이 없으시다. 예수님은 날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죄와 피터지게 싸워 이기는 사람들만이 천국의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구원이 이미 기정사실화되었으니, 이를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기가 막히다. 성경적인 믿음은 자신이 스스로 믿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이 있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기적과 이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무능하고 무기력한 믿음으로 고단하고 팍팍하게 사는 교인들이, 무슨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믿음의 소유자들인가?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기적이 일어난다고 선포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과 진배없이 무기력하게 사는 교인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다시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즉 헌금봉투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지하고 괴로워하며 애통하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필수지참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깨닫고 통렬하게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 교회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해 조목조목 가르치고 회개를 촉구하며, 죄에서 돌이키며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교회가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있는데도 죄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싸우려들지 않는데, 어떻게 상한 마음과 애통해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가?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욥4:1~9)
상한 마음과 애통하는 심령은 성령이 자신이 티끌만도 못하는 먼지이며, 아무리 몸부림치고 애를 써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철저하고 통렬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열매이다.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해주셨던 욥조차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렬하게 회개를 하며 엎드렸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깨달으려면, 깊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수이며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성령께서 깨달음으로 비추어주셔야 한다. 그러나 평소에 하나님을 찾아오지 않으면서,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석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식에 참석해서 찬송을 드리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드리는 행위로 충족되지 않는다. 그런 예배행위 이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과 성품, 말과 행동으로 행할 때 비로소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는 화려하고 럭셔리한 예배당을 지어서, 각종 인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감정을 격앙시키고 분위기를 띄우는 의식을 통해 감정을 카타르시스를 성령 충만한 예배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그러나 그런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였다면, 세상 사람들이 작금의 우리네 교회와 교회지도자 그리고 교인들을 싸잡아서 욕을 퍼붓고 냉소와 비난을 쏟아 붓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네 교회처럼 예배를 열정적으로 그리고 많이 드리는 나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행사로서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라고 착각하는 이들은,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영혼이 지옥에 던져지는 참혹한 사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 영성학교, 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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